고등부 국어 자료/고2 국어 (작품별)

[고등국어 고전시가]김인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해설

여기가로두스 2016. 8. 3. 13:33

[고등국어 고전시가]김인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해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일생을 살아감에 성품이 어설퍼서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네. 
진사 정도의 청렴하다는 명망으로 만족하는데 높은 벼슬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과거 공부에 필요한 도구를 모두 없애 버리고 자연을 찾아 놀러 다니는 옷차림으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다 본 후에, 
음풍농월하며 금강 유역에서 은거하고 지냈는데, 
서재에서 나와 세상 소식을 들으니 
일본의 통치자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고 우리 나라에 친선 사절단을 청한다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 때가 어느 때인고 하면 계미년 8월 3일이라. 
경복궁에서 임금님께 하직하고 남대문으로 내달아서 
관우의 사당 앞을 얼른 지나 전생서에 다다르니, 
사신 일행을 전송하려고 만조 백관이 다 모였네. 
곳곳마다 장막이 둘러쳐 있고 집집마다 안장을 얹은 말이 대기하고 있도다. 
전후 좌우로 모여들어 인산인해가 되었으니 
정 있는 친구들은 손 잡고 장도를 걱정하고, 
철 모르는 소년들은 한없이 부러워하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중략)

석양이 거의 되니 하나하나 이별하고 
출발 신호에 따라 차례로 떠나갈 때에, 
절과 부월 앞을 인도하는 군관이 국서를 인도하고 
비단으로 만든 양산과 순시 영기가 사신을 중심으로 모여 섰다. 
나 역시 뒤를 따라 역마에 올라 타니, 
때때옷을 입은 지로 나장이 깃을 꽂고 앞에 서고 
마두서자가 부축하고 쌍두마를 잡았구나. 
청파역졸이 큰 소리로 외치는 권마성은 무슨 일인가? 
아무리 말려도 정해진 의식이라고 굳이 하네. 
수염이 허옇게 센 늙은 선비가 갑자기 사신 노릇함이 
우습고 괴이하니 남 보기에 부끄럽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거센 바람에 돛을 달고 여섯 척의 배가 함께 떠날 때,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산과 바다를 진동하니 
물 속의 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도다. 
부산항을 얼른 떠나 오륙도 섬을 뒤로하고 
고국을 돌아보니 밤빛이 아득하여 
아무 것도 아니 보이고, 바닷가에 있는 군영 각 항구의 
불빛 두어 점이 구름 밖에서 보일 듯 말 듯하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선실에 누워서 내 신세를 생각하니 
가뜩이나 마음이 어지러운데 큰 바람이 일어나서, 
태산 같은 성난 물결이 천지에 자욱하니, 
만 석을 실을 만한 큰 배가 마치 나뭇잎이 나부끼듯 
하늘에 올랐다가 땅 밑으로 떨어지니, 
열두 발이나 되는 쌍돗대는 종이로 만든 옷처럼(나뭇가지처럼) 굽어 있고 
쉰 두 폭으로 엮어 만든 돛은 반달처럼 배가 불렀네. 
큰 우렛소리와 잦은 벼락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성난 고래와 용이 물 속에서 희롱하는 듯하네. 
선실의 요강과 타구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상하 좌우에 있는 선실의 널빤지는 저마다 소리를 내는구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윽고 해가 돋거늘 굉장한 구경을 하여 보세. 
일어나 선실 문을 열고 문설주를 잡고 서서, 
사면을 바라보니 아아! 굉장하구나, 
인생 천지간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넓고 넓은 우주 속에 다만 큰 물결뿐이로세. 
등 뒤로 돌아보니 동래의 산이 눈썹만큼이나 작게 보이고 
동남쪽을 돌아보니 바다가 끝이 없네. 
위 아래 푸른 빛이 하늘 밖에 닿아 있다. 
슬프다. 우리의 가는 길이 어디란 말인가? 
함께 떠난 다섯 척의 배는  간 곳을 모르겠도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이따금 물결 속에 
부채만한 작은 돛이 들락날락하는구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배 안을 돌아보니 저마다 배멀미를 하여 
똥물을 다 토하고 까무라쳐서 죽게 앓네. 
다행하도다. 종사상은 태연히 앉았구나. 
선실에 도로 들어와 눈 감고 누웠더니 
대마도가 가깝다고 사공이 말하거늘 
다시 일어나 나와 보니 십 리는 남았구나. 
왜선 십여 척이 배를 끌려고 마중을 나왔네. 
그제서야 돛을 내리고 뱃머리에 줄을 매어 
왜선에 줄을 던지니 왜놈이 그것을 받아 
제 배에 매어 놓고 일시에 노를 저으매 
배가 편안하고 조용하게 움직여 좌수포로 들어가니 
시간을 오후 3-5 쯤 되었고 짐을 실은 배는 먼저 와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포구로 들어가며 좌우를 둘러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의 모습이 몹시도 아름답다. 
소나무, 삼나무, 대나무, 잣나무, 귤유 등감 등이 모두 다 등청일세. 
왜인 종자 여섯 놈이 금도졍에 앉아 있구나. 
인가가 드믈어서 여기 세집 저기 네 집. 
합하여 헤아리면 오십 호가 넘지 않는다. 
집 모습이 몹시 높아서 노적더미 같구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중략)

구경하는 왜인들이 산에 앉아 굽어본다. 
그 중의 남자들은 머리를 깎았으되 
뒤통수만 조금 남겨 고추상투를 하였고, 
발벗고 바지 벗고 칼 하나씩 차고 있으며, 
여자들의 치장은 머리를 깎지 않고 
밀기름을 듬뿍 발라 뒤로 잡아매어 
족두리 모양처럼 둥글게 감았고, 
그 끝은 둘로 틀어 비녀를 질렀으며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얼레빗을 꽂았구나. 
의복을 보아하니 무 없는 두루마기 
한 동으로 된 옷단과 막은 소매가 남녀 구별 없이 한가지요, 
넓고 크게 접은 띠를 느슨하게 둘러 띠고 
늘 쓰는 모든 물건은 가슴 속에 다 품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이를 검게 칠하고 
뒤로 띠를 매었고, 과부, 처녀 , 계집아이는 
앞으로 띠를 매고 이를 칠하지 않았구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점심 먹고 길 떠나서 이십 리를 겨우 가서 
날이 저물고 큰 비가 내리니 길이 끔찍하게 질어서 
미끄러워 자주 쉬어야 하기에, 
가마 멘 다섯 놈이 서로 돌아가며 교대하되 
갈 길이 전혀 없어서 둔덕에 가마를 놓고 
한참 동안 머뭇거리면서 갈 뜻이 없는지라. 
사방을 둘러보니 천지가 어둑어둑하고 
일행들은 간 곳이 없고 등불은 꺼졌으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고, 넓고 넓은 들 가운데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왜놈들만 의지하고 앉았으니, 
오늘 밤의 이 상황은 몹시 외롭고 위태하다. 
가마꾼이 달아나면 낭패가 오죽할까. 
그놈들의 옷을 잡아 흔들어 뜻을 보이고,
가마 속에 있던 음식을 갖가지로 내어 주니, 
저희들끼리 지껄이며 먹은 후에 그제서야 가마를 메고 
조금씩 나아가는데 곳곳에 가서 이러하니 
만일 음식이 없었더라면 필연코 도주했을 것이다. 
삼경쯤이나 되어서야 겨우 대원성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여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16일에 비옷을 입고 강호(동경)로 들어갈 때에 
왼편은 마을이요, 오른편은 바다(태평양)로다. 
산을 피하고 바다를 향해 있는 들판이 옥야 천리로 생겼는데 
높은 누각과 집들은 사치스럽고 사람들이 번성하다. 
성곽의 높고 장한 모습과 다리와 배의 대단한 모습이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이 몹시 장하고 숫자가 많으니 
어설픈 붓끝으로는 이루 다 적지 못하겠도다. 
삼십 리 오는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백만이 여럿이로구나. 
여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기가 명고옥(나고야)과 한가지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하략)

실상사로 들어가니 여기도 무장주일세, 
처음에 덕천 가강(도쿠카와 이에야스)이 무장주의 태수로서, 
풍신 수길이 죽은 후에 그 가계를 없애 버리고, 
이 땅(강호)에 도읍을 정하여 강하고 풍요로우며, 
일을 계획함이 신중 은밀하며 법령도 엄격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서 왜국을 통일하니, 
아무튼 제 무리에서는 영웅이라고 하겠도다. 
덕천 가강이 죽은 후에 자손이 이어져서 
이 때까지 누려 오니 복력이 기특하다. 
17일에는 비가 개지 않아서 실상사에서 묵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자 : 김인겸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연대 : 조선 영조 40년(1764)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4(3)·4조, 4음보, 총 8000여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래 : 기행가사, 장편가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사실적, 직서적, 서술적
영조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작자가 그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그 이듬해 돌아올 때까지 약 11개월에 걸친 여행 중의 생활, 일본과의 외교적 편모, 일본의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화자의 태도 : 임란후 대왜 감정이 좋지 않아  '일본인'을 왜놈이라 칭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일본을 오랑캐로 보고 우수한 조선의 문화를 전수하여 교화시키고자 하는 화자의 문화적 자부심과 우월감이 나타나 있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성 : 추보식 구성
제 1권 212구 : 일본에서 친선 사절을 청하여, 여러 수속 끝에 8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 충주, 문경,  예천, 안동, 영천, 경주, 울산, 동래를 거쳐 8월 20일 부산에 이름
제 2권 5845구 : 10월 6일, 부산에서 승선하여 발선하는 장면에서부터 대마도, 일기도, 축전주, 남도를 거쳐 적간관에 도착하여 12월 30일까지 머묾.
제 3권 368구  : 정월 초하루 적간관의 명절 이야기로부터 오사카, 교토, 오다와라, 시나카와를 거쳐 에도에 들어가 2월 27일 국서 전달 사행(使行)의 임무를 마치고, 3월 6일까지 머묾..
제 4권 1818구  : 3월 7일 관백의 답서 받고, 3월 11일 귀로에 올라, 6월 22일 부산에 귀환, 6월 25일 부산 출발 7월 8일 서울에 와서 영조께 복명(
다녀온 결과를 보고)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제재 : 일본의 풍속, 제도, 인정 등의 견문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일본의 문물ㆍ제도ㆍ인물ㆍ풍속 등 일본 여행에서의 견문과 여정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표현 :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대구, 직유, 과장 등 다양한 표현법 사용했으며, 정확한 날짜, 날씨, 자연 환경, 사건, 감상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했고, 작가의 예리한 비판 정신과 재치, 해학이 담겨 있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의의 : 총 4권, 4책으로 8천여 구나 되는 현존 최장편 기행 가사이며, 조선 말 외국 여행 가사로서 홍순학의  '연행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기행 가사의 백미이다. 특히 한글 장편 기행 가사로 되었다는데서 작자의 평민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정확한 노정과 일시를 적고, 날씨, 자연 환경, 실지 답사에서 얻은 경험과 함께 작자의 공정한 비판, 흐믓한 해학 등을 맛볼 수 있어 기행문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전 : 가람 문고본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일생을 살아감에 성품이 어설퍼서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네. 
진사 정도의 청렴하다는 명망으로 만족하는데 높은 벼슬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과거 공부에 필요한 도구를 모두 없애 버리고 자연을 찾아 놀러 다니는 옷차림으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다 본 후에, 
음풍농월하며 금강 유역에서 은거하고 지냈는데, 
서재에서 나와 세상 소식을 들으니 
일본의 통치자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고 우리 나라에 친선 사절단을 청한다네.

일본에서 통신사를 청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자신이 공명에 뜻이 없음을 나타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자가 벼슬에 뜻이 없고 음풍 농월하며 산천을 유람하고자 함은 나타낸 것.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서재에만 있다가 세상 소식(일본에서 우리나라에 통신사를 청해온 소식) 들으니

- 이해와 감상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순 국문으로 되어 있는 기행문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로 지은이의 죽고 칠현의 은둔 사상을 본받은 인생관이 드러나 있으며, 일본에서 우리 나라에 통신사를 청함을 노래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 때가 어느 때인고 하면 계미년 8월 3일이라. 
경복궁에서 임금님께 하직하고 남대문으로 내달아서 
관우의 사당 앞을 얼른 지나 전생서에 다다르니, 
사신 일행을 전송하려고 만조 백관이 다 모였네. 
곳곳마다 장막이 둘러쳐 있고 집집마다 안장을 얹은 말이 대기하고 있도다. 
전후 좌우로 모여들어 인산인해가 되었으니 
정 있는 친구들은 손 잡고 장도를 걱정하고, 
철 모르는 소년들은 한없이 부러워하네.

- 만조 백관들과의 작별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사신 일행을 전별하는 환송장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중략)
석양이 거의 되니 하나하나 이별하고 
출발 신호에 따라 차례로 떠나갈 때에, 
절과 부월 앞을 인도하는 군관이 국서를 인도하고 
비단으로 만든 양산과 순시 영기가 사신을 중심으로 모여 섰다. 
나 역시 뒤를 따라 역마에 올라 타니, 
때때옷을 입은 지로 나장이 깃을 꽂고 앞에 서고 
마두서자가 부축하고 쌍두마를 잡았구나. 
청파역졸이 큰 소리로 외치는 권마성은 무슨 일인가? 
아무리 말려도 정해진 의식이라고 굳이 하네. 
수염이 허옇게 센 늙은 선비가 갑자기 사신 노릇함이 
우습고 괴이하니 남 보기에 부끄럽다.

- 사신 일행이 출발하는 광경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출발 광경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을 나타냄

이해와 감상

  영조 39년 한양을 떠나는 출발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통신사의 행차에 대하여 은거지에서 은거하고 있던 지은이의 성품으로 보아 지나치게 번거로워하는 지은이의 감정을 볼 수 있다. 전반의 환송장의 정경이나, 후반의 출발 광경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묘사하여 당시의 사절단 규모와 사회상을 여실히 짐직할 수 있다. 그리고, 진사청명으로서의 벼슬은 안해도 선비의 품격을 갖춘 지은이의 덕망을 엿볼 수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거센 바람에 돛을 달고 여섯 척의 배[
사절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음]가 함께 떠날 때, 
삼현과 군악소리[
거문고, 가야금, 당비파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산과 바다를 진동하니 
물 속의 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도다.[
군악 소리에 물속의 고기들이 놀랐다는 말로 성대한 환송 분위기
해구[
부산항]를 얼른 떠나 오륙도를[부산 앞바다에 있는 섬] 뒤로하고 
고국을 돌아보니 야색(
밤 경치)이 창망하여[멀고 아득하여
아무 것도 아니 보이고, 바닷가에 있는 군영 각 항구의 
불빛 두어 점[
거리감이 드러남]이 구름 밖에서 보일 듯 말 듯하다.

- 부산항 출발 광경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당풍의 돛을 달아 육선이 함께 떠나게 되고, 환송하는 풍악 소리가 굉장하게 울려 퍼지니, 물 속의 고기와 용들이 마땅히 놀람직하구나 : 바람이 거세고, 출발의 정경을 보여 주고 있으며, 배의 위용이 대단하고, 환송의 분위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고국을 돌아 보니 야색이 창망하여 : 작가가 고국을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조국의 운명과 현실이 그리 밝지 못하고 암울함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선실에 누워서 내 신세를 생각하니 
가뜩이나 마음이 어지러운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궂은 날씨가 겹쳐 마음이 불안함], 
태산 같은 성난 물결이 천지에 자욱하니, 
만 석을 실을 만한 큰 배가 마치 나뭇잎이 나부끼듯 
하늘에 올랐다가 지함(
땅 밑 / 지면이 움푹 주저 앉은 곳)에 떨어지니, 
열두 발이나 되는 쌍돗대는 솜대신 종이로 만든 옷처럼 굽어 있고 
쉰 두 폭으로 엮어 만든 짚으로 만든 돛은 반달처럼 배가 불렀네. 
큰 우렛소리와 잦은 벼락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성난 고래와 용(
사나운 파도를 비유)이 물 속에서 희롱하는 듯하네. 
선실의 요강과 타구[
가래침 뱉는 그릇]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상하 좌우에 있는 선실의 널빤지는 조각조각 저마다 소리를 내는구나.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하늘의 올라다가 디함(지함)의 나려지니 : 파도가 매우 심함을 과장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상하 좌우 배방 널은 닙닙히 우는구나. : 
선실(船室) 사방에 있는 널빤지들은 배가 파도에 휩쓸림에 따라 낱낱이 소리를 내는구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윽고 해가 돋거늘 굉장한 구경을 하여 보세.[해돋이의 장관에 대한 감탄
일어나 선실 문을 열고 문설주를 잡고 서서, 
사면을 바라보니 아아! 굉장하구나[
감탄], 
인생 천지간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넓고 넓은 우주 속에 다만 큰 물결뿐이로세. 
등 뒤로 돌아보니 동래의 산이 눈썹만큼이나 작게 보이고[
원경]
동남쪽을 돌아보니 바다가 끝이 없네. 
위 아래 푸른 빛이 하늘 밖에 닿아 있다. 
(수평선)
슬프다. 우리의 가는 길이 어디란 말인가? [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 있는 막막함, 슬픔의 정서]
함께 떠난 다섯 척의 배는  간 곳을 모르겠도다. [
바다 위에서 폭풍을 만나 같이 떠난 나머지 다섯 척 배의 행방을 알 수 있음]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이따금 물결 속에 
부채만한 작은 돛이 들락날락하는구나.[
같이 떠난 일행의 배가 멀리 보인다는 말]

바다의 장관과 폭풍이 지난 후 망망대해를 바라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슬프다 우리 길이 어디로 가난 쟉고 :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상황. 슬픔의 정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부채만한 작은 돛이 들락날락하는구나. : 함께 떠난 배들과 멀리 떨어진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부산항에서 환송을 받으며 뱃길로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과 배 위에서의 체험, 감상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특히 부산항에서 발선(發船)하는 광경과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정경 및 폭풍이 걷힌 후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장관이 실감있게 그려져 있다. 자칫 피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감정을 억누르고 이만큼 실감 있게 그려 놓았다는 데, 또 다른 감흥을 맛볼 수 있다.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부분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배 안을 돌아보니 저마다 배멀미를 하여 
똥물을 다 토하고 까무라쳐서 죽게 앓네. 
다행하도다. 종사상은 태연히 앉았구나. 
선실에 도로 들어와 눈 감고 누웠더니 
대마도가 가깝다고 사공이 말하거늘 
다시 일어나 나와 보니 십 리는 남았구나. 
왜선 십여 척이 배를 끌려고 마중을 나왔네. 
그제서야 돛을 내리고 뱃머리에 줄을 매어 
왜선에 줄을 던지니 왜놈이 그것을 받아 
제 배에 매어 놓고 일시에 노를 저으매 
배가 편안하고 조용하게 움직여 좌수포로 들어가니 
시간을 오후 3-5 쯤 되었고 짐을 실은 배는 먼저 와 있다.

 - 폭풍에 시달린 끝에 대마도에 당도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포구로 들어가며 좌우를 둘러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의 모습이 몹시도 아름답다. 
소나무, 삼나무, 대나무, 잣나무, 귤유 등감 등이 모두 다 등청일세. 
왜인 종자 여섯 놈이 금도졍에 앉아 있구나. 
인가가 드믈어서 여기 세집 저기 네 집. 
합하여 헤아리면 오십 호가 넘지 않는다. 
집 모습이 몹시 높아서 노적더미 같구나.

- 대마도의 풍광과 인가의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봉만(峰巒)이 삭닙(削立)하야 경치가 긔졀(奇絶)하다. : 산꼭대기의 봉우리들이 뾰족뾰족이 솟아 깎아지른 듯이 서 있어 경치가 빼어남. 포구에서 바라본 산의 경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중략)

구경하는 왜인들이 산에 앉아 굽어본다. 
그 중의 남자들은 머리를 깎았으되 
뒤통수만 조금 남겨 고추상투를 하였고, 
발벗고 바지 벗고 칼 하나씩 차고 있으며, 
여자들의 치장은 머리를 깎지 않고 
밀기름을 듬뿍 발라 뒤로 잡아매어 
족두리 모양처럼 둥글게 감았고, 
그 끝은 둘로 틀어 비녀를 질렀으며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얼레빗을 꽂았구나. 
의복을 보아하니 무 없는 두루마기 
한 동으로 된 옷단과 막은 소매가 남녀 구별 없이 한가지요, 
넓고 크게 접은 띠를 느슨하게 둘러 띠고 
늘 쓰는 모든 물건은 가슴 속에 다 품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이를 검게 칠하고 
뒤로 띠를 매었고, 과부, 처녀 , 계집아이는 
앞으로 띠를 매고 이를 칠하지 않았구나.

왜인들의 머리 치장과 옷차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점심 먹고 길 떠나서 이십 리를 겨우 가서 
날이 저물고 큰 비가 내리니 길이 끔찍하게 질어서(
질기가 끔찍하여
미끄러워 자주 쉬어야 하기에, 
가마 멘 다섯 놈이 서로 돌아가며 교대(
체번)하되 
갈 길이 전혀 없어서 둔덕에 가마를 놓고 
한참 동안 머뭇거리면서 갈 뜻이 없는지라. 
사방을 둘러보니 천지가 어둑어둑하고 
일행들은 간 곳이 없고 등불은 꺼졌으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고, 넓고 넓은 들 가운데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왜놈들만 의지하고 앉았으니, 
오늘 밤의 이 상황은 몹시 외롭고 위태하다. 
가마꾼이 달아나면 낭패가 오죽할까. 
그놈들의 옷을 잡아 흔들어 뜻을 보이고,
가마 속에 있던 음식을 갖가지로 내어 주니, 
저희들끼리 지껄이며 먹은 후에 그제서야 가마를 메고 
조금씩 나아가는데 곳곳에 가서 이러하니 
만일 음식이 없었더라면 필연코 도주했을 것이다. 
삼경쯤이나 되어서야 겨우 대원성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여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강호(江戶)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고생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저희들끼리 지껄이며 먹은 후에 그제서야 가마를 메고 : 작가가 새에게 어울릴 법한 지저귄다는 표현을 사람에게 사용한 것은 대상을 그만큼 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16일에 비옷을 입고 강호(동경)로 들어갈 때에 
왼편은 마을이요, 오른편은 바다(태평양)로다. 
산을 피하고 바다를 향해 있는 들판이 옥야 천리로 생겼는데 
높은 누각과 집들은 사치스럽고 사람들이 번성하다. 
성곽의 높고 장한 모습과 다리와 배의 대단한 모습이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이 몹시 장하고 숫자가 많으니 
어설픈 붓끝으로는 이루 다 적지 못하겠도다. 
삼십 리 오는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 헤아려 보면 백만이 여럿이로구나. 
여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기가 명고옥(나고야)과 한가지다.

- 강호의 번성한 모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하략)

실상사로 들어가니 여기도 무장주일세, 
처음에 덕천 가강(도쿠카와 이에야스)이 무장주의 태수로서, 
풍신 수길이 죽은 후에 그 가계를 없애 버리고, 
이 땅(강호)에 도읍을 정하여 강하고 풍요로우며, 
일을 계획함이 신중 은밀하며 법령도 엄격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서 왜국을 통일하니, 
아무튼 제 무리에서는 영웅이라고 하겠도다. 
덕천 가강이 죽은 후에 자손이 이어져서 
이 때까지 누려 오니 복력이 기특하다. 
17일에는 비가 개지 않아서 실상사에서 묵었다.

실상사에 묵으면서 그 곳에서 일어난 역사를 회고함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하 수업 자료임

 

이십칠 일[1764년 음력 1월 27일] 사상네가[사절단 일행] 관소[관리들이나 외교관을 대접하기 위한 숙소]]에 잠간 내려

숙공[익은 음식] 받고 잠간 쉬어

저무도록 행선하여 청포로 올라오니[청포까지는 바다를 통해 배로 이동하는 여정임],

여염[일반 백성들의 살림집]도 즐비하여

물가에 성을 쌓고 경개[경치]가 기이하다.  - 일본 청포에 도착함

물속에 수기[물을 끌어오는 기계] 높아 강물을 자아다가[끌어들여]

홈으로 인수하여[물을 끌어] 성안으로 들어가니

제작이 기묘하여 본받음직 하고나[수용의 자세 / 실용적인 이용후생의 자세- 편리하게 물을 운반하는 수기의 기묘함

그 수기 자세히 보니 물레를 만들어서

좌우에 박은 살이 각각 스물 여덟이오[작가의 정확하고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임]

살마다 끝에다가 널 하나씩 가로 매어 물속에 세웠으니

강물이 널을 밀면 물레가 절로 도니[강물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수기]

살 끝에 작은 통을 노으로[노끈으로] 매었으니

그 통이 물을 떠서 돌아갈 제 올라가면

통 아래 말뚝 막아 공중에 나무를 매어

말뚝이 걸리면 그 물이 쏟아져서 홈 속으로 드는구나[수기로부터 홈으로 물이 운반되는 원리]  - 수기의 구조와 작동 원리

물레가 빙빙 도니 빈 통이 내려와서

또 떠서 순환하여 주야로 불식하니[쉬지 않으니]

인력을 아니 들였어도[자동]

성가퀴 높은 위에 물리 절로 넘어가서[그 수기 자세히 보니 ~ 절로 넘어 가서 : 수기의 작동 과정]

온 성안 거민[성안 백성]들이 이 물을 받아 먹어 부족들 아니하니,

진실로 기특하고 묘함도 묘할씨고[감탄- 수기의 가치와 효용성

지명은 하내주요 사십 리 와 있구나. - 하내주에 도착함
 

이십팔 일 발행할 새[28일부터는 육로를 이용하여 이동함] 수백 필 금안준마[금으로 꾸민 안장을 얹은 좋은 말 / 화려한 행장]

중하관을 다 태우니 기구도 장할시고[사신들을 수행하는 많은 중하급 관원들까지 모두 태운 장비의 성대함]

각 방 노자[사내종]들도 호사[호화롭게 사치함]가 참람하다[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치다]. - 사신단 이동에 사용할 기구들의 성대함

좌우에 쌍견마[말 한 필에 고삐 둘을 하여 양쪽으로 나누어 두 사람의 마부가 이끄는 말]요, 한 놈은 우산 받고

두 놈은 부축하고 담배 기구 한 놈 들고[담배가 별도의 담당자가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기호 식품이자 접대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음]

한 놈은 등불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한 사람의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나하고 삼 문사는 가마 타고 먼저 가니

금안을 지운 재고[동작이 빠르고] 큰 말 거듭[두 마리] 말로 앞에 섰다. - 사신단 호위 행렬의 인원 배치

여염도 왕왕[자주] 있고 흔한 손 죽전[대밭 /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남]일다.

토지가 고유하여[땅이 비옥하여] 전답이 마이[아주] 좋이,[비옥한 토지에 대한 화자의 감탄]

이십리 실상사로 가 삼사상[사신 3인] 조복[예복]할[입을] 제[],

나는 내리잖고 왜성[교토]으로 바로 가니

 

 사신단들은 한양 - 용인 - 충주 - 문경 - 예천 - 안동 - 영천 - 경주 - 울산 - 동래 - 부산 - 대마도 - 일기도 - 축전주 - 남도 - 적간관 - 오사카 - 교토 - 오다와라 - 시니키와 - 에도(지금의 도쿄)를 여행

 

인민이 부려하기[부유하고 화려하기]대판[오사카]만은 못하여도

성에서 동에 가기 삼십 리라 하는구나.[생각보다 큰 왜성의 규모에 놀라고 있다.]

관사[사신이나 벼슬아치를 대접하기 위한 숙소]는 봉국사요 오층 문루 위에

여남은[열이 조금 넘은] 구리 기둥 운소[구름 낀 하늘]에 닿았구나.[구리 기둥의 위용]

수석도 기절하고[아주 신기하고 기이하고] 죽수[대나무]도 유취[그윽한 정취] 있네.[일본 경치에 대한 감상]

왜황의 사는 데라 사치가 측량없다[일본 왕이 사는 교토의 화려함과 지나친 사치에 대한 강직한 성품의 유학자로서 비판적인 시각이 깔려 있음- 객관인 봉국사의 경치와 사치스러움

산형이[산세] 웅장하고 수세도 환포하여[사방으로 둘러싸여]

옥야천리[넓고 기름진 평야]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화자의 태도가 드러남]

이리 좋은 천부[하늘이 주었다는 뜻 / 타고날 때부터지님] 금탕[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성] 왜놈[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직설적으로 표현]의 기물 되어

칭제 칭황하고[황제를 자칭하며] 전자전손[자손에게 전수 / 대대손손]하니

개돗[개돼지] 같은 비린 유[것 = 왜놈, 일본인]들 몰속[모두 다] 소탕하고

사천 리 육십 주[일본 국토와 행정 구역]를 조선 땅을 만들어서

왕화에 목욕 감겨 예의 국민 만들고자[임금의 교에 목욕을 감겨 예의있는 국민을 만들고 싶음 / 화자의 소망- 천혜의 자연과 기름진 땅에 대한 감상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

 

(하략)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조선 영조 때의 문인 김인겸의 작품으로, 영조 39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작가가,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일본의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영조 39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7월 8일 경희궁에 들어가 복명(復命)할 때까지의 약 11개월에 걸친 긴 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으로, 총 4책 8,000여 구나 되는 대작이다.

 정확한 노정(路程)과 일시(日時)를 적고, 날씨, 자연 환경, 일어난 사건, 작자의 느낌 등을 과장 없이 그대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도처에 날카로운 비판과 유머가 곁들어져 있어 기행 문학의 묘미를 십분 살려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홍순학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루는 장편 기행 가사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

이해와 감상1

조선 후기에김인겸(金仁謙)이 지은 기행가사. 국문본. 총 7,158행 3,500여구에 달하는 장편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은 1763년(영조 39) 8월 일본 통신사 조엄(趙湄),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제술관(製述官) 남옥(南玉)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수행한 작자가 이듬해 7월 8일 복명할 때까지 11개월 동안 견문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군관 17명, 역관 12명, 의원 3명을 비롯, 100여명의 행원(行員)과 400명에 달하는 역원들을 합하여 일행 500명이 서울을 떠난 지 두달 만인 10월 6일 부산항에서 승선하여 대마도와 대판성(大阪城)을 거쳐 에도(江戶)에 도착한 것이 다음해 2월 16일이다.

이역만리의 긴 노정에 따라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의 풍속, 외교임무의 수행과정 등을 소상히 기록하였고, 강직한 선비의 기개와 비판의식이 넘쳐 있을 뿐 아니라, 기행문의 요체가 잘 갖추어져 있어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자 김인겸은 1753년(영조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통신사의 서기로 발탁되기까지 향리 공주에 칩거한 강직 청렴한 선비로서, 문장에 특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행로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과 풍물에 대한 이야기며, 수천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왜인에게 준 문인외교의 편모를 알 수 있다.

특히 “당당한 천승국의 예물예단 가져와서 개돝 같은 취류에 사배(四拜)하기 어떠할꼬.”라는 구절에서는 개돝 같은 왜놈에게 예배하기 싫어 상사(上使)들의 강권도 듣지 않고 국서 봉정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작자의 대일감정을 엿볼 수 있다. 왜녀의 음란한 풍속과 일본의 경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 강직 청렴한 정신과 여유와 해학이 넘치는 성격이 반영되어 있으면서 지명·인명·일시·거리와 역사적인 사실에 객관성을 잃지 않은 고전기행문의 대표작이다. 국내의 노정은 주로 삽화와 지방의 특색을 서술하고 감상을 주로 하고 있으나, 일본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 관찰과 주관적 비판으로 일관하면서도 주체적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국문학자료로서는 물론, 외교사절단의 규모와 일본의 풍속 및 외교의 방법 등, 한일외교사의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작품은 가사체로 된 기행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서정적 가사라기보다 기행수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본이 영인, 보급되어 있고, 따로 이가원(李家源)본이 있다.

≪참고문헌≫ 海行摠載, 韓國古典文學의 理解(張德順, 一志社, 1973), 日東壯遊歌(沈載完, 語文學 17·19·20, 196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김인겸 金仁謙 (1707~1772)

 1707(숙종 33)∼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 상헌(尙憲)의 현손,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창복(昌復),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서주(瑞周)의 딸이다.

 문벌이 혁혁(赫赫)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수능(壽能)은 서출이라 과거에 급제하고도 현감에 그쳤다. 14세 때에 아버지를 사별하고, 가난에 시달려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47세 때인 1753년(영조 29)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57세 때인 1763년에는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종사관인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통신사 조엄(趙湄)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그뒤 지평현감(砥平縣監)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동사록 東笑錄≫이 있다.

 ≪참고문헌≫ 海笑日記, 韓國紀行文學硏究(崔康賢, 一志社, 1982), 日東壯遊歌의 作者 및 背景硏究(金南秀, 建國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7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선통신사 (朝鮮通信使)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 ·일 양국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는 통신 활동

기간 : 763년(영조 39) 8월 3일부터 이듬해 7월 8일에 돌아오기까지 11개월(일본에 머물렀던 기간은 11개월이고, 나머지는 왕복 기간이다.)

여행 목적 : 일본 관백 원가중이 퇴휴하고 그 아들인 원가치가 관백의 자리를 계승하자 일본 측에서 구호를 또는 수교하자는 요청이 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여 영조 39년 게미 8월에 통신사를 차출하였다. 일본의 관백인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자 그의 아들 토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것임.

여행한 곳 : 대마도 - 오오사카 - 에도(도쿄의 옛이름)

기타 : 일종의 문화사절단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우리나라는 문화국으로 일본의 야만적이고, 비문화적인 면을 멸시하는 경향이 농후하여 통신사들은 가는 곳마다 김인겸이 귀국하여 영조에 복명한 것을 보면, 왜인에게 지어준 것이 몇천 수가 된다고 하였으니, 그 때의 외교는 작시(作詩)외교라고 할 만 것이었다. 고종 13년에는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어 김기수가 갔었고, 다음 해에는 김홍집이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