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국어 자료/수능 국어 대비

[2017 수능특강 국어] 문학 현대시 지문 전체 모음 (필기용)

여기가로두스 2016. 5. 12. 02:30

[2017 수능특강 국어] 문학 현대시 지문 전체 모음 (필기용) 


수능특강 현대시.hwp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산유화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박두진, ‘도봉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煙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은 언제 오나요 / 하룻밤만 자면 내일이지

다음 날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일인가요? / 아니란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또 하룻밤 더 자야 한단다

 

고향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어머니 임종의 이마에

둘러앉아 있는 어제의 것들이 물었습니다

얘야 내일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럼요 하룻밤만 지나면 내일인 걸요

어제의 것들은 물도 들고 간신히 기운도 차렸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의 베갯모에

수실로 뜨인 학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다시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일이지 / 아니에요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하룻밤을 지내야 해요

 

이제 더 이상 고향에서 급한 전갈이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 어머니는 어제라는 집에

아내는 오늘이라는 집에 / 딸은 내일이라는 집에 살면서

나와 쉽게 만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종철, ‘만나는 법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하고 제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 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윤제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출출이 : 뱁새.

* 마가리 : 오막살이.

* 고조곤히 : 고요하게. 조용하게.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지척(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 떼들, 꿀벌 떼들, 우리 집 뜨락에 어제오늘 가득하다 잔치 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만개(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왕복(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광()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채밀*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 정진규, ‘산수유 - 1’

 

* 염장(鹽藏) : 소금에 절여 저장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 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이육사, ‘교목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 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 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 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 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 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 고재종, ‘세한도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정지용,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를 믿고 어떻게 살어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벼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김광균, ‘노신(魯迅)’

 

* 노신 : 중국의 작가 루쉰(1881~1936)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 ‘성탄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 (), ()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윤동주, ‘별 헤는 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 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서정주, ‘무등을 보며

* 청태 : 푸른 이끼.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장석남, ‘수묵(水墨) 정원 9 번짐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1’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을 별일 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밋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생채기. 첫 고향의 꽃밭에 마지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날개는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빠삭 말라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

 

, …… 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면 아방(我方)의 따스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지막 꽃밭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설픈 표시의 벽. ()……

- 박봉우, ‘나비와 철조망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 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울 강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고은, ‘눈길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다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痛哭)과도 같은 낙조(落照)가 물들고 있었다.

 

- 조지훈, ‘동물원의 오후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룟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신경림, ‘농무

* 쇠전 : 소를 사고파는 장.

* 도수장 : 도살장. 고기를 얻기 위하여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

* 날라리 : 악기 태평소를 달리 이르는 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A

 

B

 

C

운동장

소줏집

장거리

쇠전

도수장

()

 

무교동, 종로, 명동, 남산, 서울역 앞

남대문 시장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기형도, ‘홀린 사람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최두석, ‘성에꽃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 김광규, ‘안개의 나라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버레소리* 젖어 흐르고

버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드라

성글어 좋드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드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 신석정, ‘대숲에 서서

 

* 버레소리 : 벌레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