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수능특강 국어 문학>황동규 '즐거운 편지' 해설
황동규 「즐거운 편지」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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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적인 문학체험 보충자료> ‘즐거운 편지’ - 시인이 말하는 ‘나의 시’
아래 글은 시인 자신이 쓴, ‘즐거운 편지’의 시작(詩作) 배경에 대한 글입니다. 그 외에 다른 문학가들이 어떻게 시를 썼을까,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썼을까가 궁금한 친구는 『나의 문학 이야기』(문학동네)를 찾아보도록, 황동규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시가 태어나는 자리』(문학동네)에 있음. |
「즐거운 편지」의 얼개 출전 『詩가 태어나는 자리』, 황동규, 문학동네
- 내 시 「즐거운 편지」는 원래는 고등학교 삼학년 초중반에 씌어져서 졸업 무렵 받은 교지에 실렸던 작품.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연상의 여자에 대한 짝사랑이었다고 기억된다.
- 이 시를 읽는 두 가지 태도 (1. 전통을 따르려는 마음의 자세 2.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1. 전통의 계승
연애시, 사랑노래를 이어받은 것. 이것은 고려가요의 「가시리」에서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서정주에 이르는 시의 전통이다. 「진달래꽃」(‘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이나 「님의 침묵」(‘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에서처럼 애인은 떠나가고, 화자(話者)는 뒤에 남아 가는 사람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사랑이 제시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는 구절도 전통 시가에 나오는 화자의 오래 참으며 기다리겠다는 인내심과 또 자신을 극소화시키는, 남성우위 시대에서는 여성화시키는, 그래서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자세가 다 들어 있다.
2. 전통의 변형 (변주)
첫째,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이 과연 사소한 일이냐는 의문 ; 화자의 아이러니
둘째,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가 내포하는 정신, 혹은 자세 ;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결국 인간의 선택 대상의 하나가 될 뿐이라는 생각. 당시(6․25 직후) 폐허화된 우리 사회 전체를 뒤덮었던 실존주의의 분위기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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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에 ‘반드시’까지 들어가서 상당히 강조된 것인데, 이건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연애시에 없던 겁니다. 실존주의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이 일생 동안 서로 사랑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랑은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되는 것이지 한 번 주어진 사랑의 본질 때문에 일생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이 시의 초점입니다. 첫 마디는 역설이고 반어법입니다만, 넓은 의미에서 「가시리」의 ‘가시난닷 도셔 오쇼셔’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째 마디에 가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립니다. 자신의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하고, 사랑도 언제나 끝날 수 있다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이 이 시의 초점이 되고 내가 받은 전통을 그대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겁니다. 이 시의 가치가 있다면 오랜 전통에 처음으로 변화를 준 것입니다.
‘즐거운 편지’를 쓸 무렵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 몇 년 되지 않은 삭막한 때였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사르트르 유의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실존주의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내용도 모르고 암기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실존주의적인 분위기만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정된 사랑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도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되는 것이고, 늘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생각이 이 연애시 속에 들어간 겁니다.
- 출처 『나의 문학 이야기』, 황동규,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