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수능특강 국어 문학] 박인로 '누항사' 해설 및 해제
[2017 수능특강 국어 문학] 박인로 '누항사' 해설 및 해제.hwp
누항사(陋巷詞)
박인로
* 해설 : 지은이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고향인 경기도 용진에 돌아가 생활하던 중에,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그에게 두메 생활의 어려운 형편을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지은 작품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궁핍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표현하였으며,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안빈 낙도(安貧樂道)의 뜻을 버리지 않는 당당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유자(儒者)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심했는데, 이런 문제 의식이 잘 드러난 것이 이 작품이다. 특히 일상 생활의 언어를 폭넓게 사용하여 표현의 구체성과 생동감을 획득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연대 : 조선 광해군 3년(1611), 지은이 51세 때
* 갈래 : 서정 가사
* 성격 : 전원적, 사색적, 한정가(閑情歌)
* 율격 : 3(4)․4조, 4음보 연속체
* 표현 : 대구법, 설의법, 과장법, 열거법
* 구성 : 서사 ― 본사 ― 결사
서사 - 길흉 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
본사 1 - 충성심으로 백전 고투했던 왜란의 회상
본사 2 - 전란 후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지음
본사 3 - 농사를 지으려 하니 농우가 없어, 농우를 빌리러 감
본사 4 - 농우를 빌리러 갔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옴
본사 5 - 집에 돌아와 야박한 세태를 한탄하며 춘경을 포기함
결사 1 - 자연을 벗삼으면서 절로 늙기를 소망함
결사 2 - 빈이 무원하고 단사 표음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충효와 화형제․신붕우에 힘씀
* 화자 : 가난한 생활 속에서 안빈일념을 지닌 사람
* 제재 : 빈이무원(貧而無怨)의 삶
* 주제 : 곤궁한 생활상과 안빈 낙도의 추구
* 출전 : <노계집(蘆溪集)>
* 특징 : 임진왜란 이후에 당면한 작자의 당면한 현실이 잘 나타남
사대부와 농민, 양쪽에서 소외되어 있는 괴로움을 절실하게 그림
표현면에서 미화된 말을 버리고 실감을 얻는 길을 열어 사대부 가사의 한계를 벗어남
설득력을 잃은 가치관(빈이무원, 안빈낙도)을 여전히 지향하는 한계를 지님
* 출전 : <노계집>
* 의의 : 정철에 이르러서 절정을 이룩한 미화된 표현을 버리는 대신 현실 인식의 실감을 확보하는 길을 열어 사대부 가사의 한계를 탈피하고 가사가 시조보다 개방적일 수 있음을 입증함. 일상 생활의 언사를 대폭 받아들임.→ 조선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적 역할.
<서 사 : 길흉 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
어리고 迂闊(우활)산 이 우 더니 업다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은 나 보다 더한 이가 없다.
吉凶 禍福(길흉화복)을 하날긔 부쳐 두고
좋고 나쁜 운수를 하늘에게 맡겨 두고
陋巷(누항) 깁푼 곳의 草幕(초막)을 지어 두고,
누추한 고장 깊은 곳에 초가집
風朝雨夕(풍조우석)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바람 부는 아침과 비오는 저녁(고르지 못한 날씨) 썩은 짚이 땔감이
셔홉 밥 닷 홉 粥(죽)에 煙氣(연기)도 하도 할샤.
서 홉의 밥과 다섯 홉의 죽(초라한 음식) 많기도 많구나.
설데인 熟冷(숙냉)애 뷘 쇡일 이로다.
덜 데운 숭늉에 고픈 배 속일 뿐이구나.
生涯(생애) 이러다 丈夫(장부) 을 옴길런가.
살림살이가 이렇다고 대장부 뜻을 바꿀 수 있으랴
安貧一念(안빈일념)을 젹을망정 품고 이셔.
빈궁해도 마음이 편하여 한결 같음 적을 망정
隨宜(수의)로 살려 니 날로조차 齟齬(저어)다.
옳은 일을 좇음 날이 갈수록 어긋난다(뜻대로 되지 않는다)
히 不足(부족)거든 봄이라 有餘(유여)며,
가을이 부족한데 봄엔들 여유가 있을 것이며
주머니 뷔엿거든 甁(병)의라 담겨시랴.
비었는데 술병이라고 (술이) 담겼겠는가
貧困(빈곤) 人生(인생)이 天地間(천지간)의 나이라.
사람이 온 세상에 나 뿐이라.
<본사 1 : 충성으로 백전고투했던 왜란의 회상>
飢寒(기한)이 切身(절신)다 一丹心(일단심)을 이질가.
배고픔과 추위가 목숨을 끊은들 한결같은 마음 잊을 것인가
奮義忘身(분의망신)하야 죽어야 말녀 너겨.
의로움에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고야 말겠다고 여겨
于橐(우탁) 于囊(우낭)의 줌줌이 모와 녀코,
전대와 주머니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兵戈(병과) 五載(오재)예 敢死心(감사심)을 가져 이셔,
전란(임진왜란) 5년 동안 용감히 죽겠다는 마음
履尸涉血(이시섭혈)야 몃 百戰(백전)을 지연고.
주검(시체)를 밟고 피를 건너감 몇 백번의 전투 지냈던가
<본사 2 : 전란 후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지음>
一身(일신)이 餘暇(여가)잇사 一家(일가)를 도라보랴.
이 한 몸이 겨를 있어서 집안 돌보겠는가
一奴長鬚(일노장수) 奴主分(노주분)을 이졋거든,
긴 수염이 난 늙은 한 종은 종과 주인 사이의 도리 잊었는데
告余春及(고여춘급)을 어 사이 생각리.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려 줌 어느
耕當問奴(경당문노)인 눌더려 물고.
밭 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어야 하나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躬耕稼穡(궁경가색)이 分(분)인 줄 알리로다.
몸소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둠이 내 분수 알겠도다.
莘野耕叟(신야경수)와 壟上耕翁(농상경옹)을 賤(천)타 리 업것마
신야에서 밭 갈던 늙은이(은나라 이윤)와 밭둑에서 밭 갈던 노인(촉한 제갈량)을 천하다고 할 사람은 없건마는
아므려 갈고젼 어 쇼로 갈로손고.
아무리 갈고자 한들 어느 소로 갈 것인가?
<본사 3 : 농사를 지으려 하니 농우가 없어, 농우를 빌리러 감>
旱旣太甚(한기태심)야 時節(시절)이 다 느즌 졔
가뭄이 이미 크게 들어 농사를 짓기에 좋은 시절 늦은 때에
西疇(서주) 놉흔 논애 잠 녈비예
서쪽 두둑 높은 논 갠 지나가는 비
道上(도상) 無源水(뮤원수)를 반만 혀 두고,
길 위 흘러내리는근원이 없는 물 반 만큼 대어 두고
쇼 젹 듀마고 엄섬이 말삼,
소 한 번 주마하고 엉성히(탐탁치 않게) 하는 말씀을
親切(친절)호라 너긴 집의 달 업슨 黃昏(황혼)의 허위허위 다라가셔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도 없는 허둥지둥 달려가서
구디 다 門(문) 밧긔 어득히 혼자 서서
굳게 닫은 우두커니
큰 기 아함이를 良久(양구)토록 온 後(후)에
에헴하는 인기척 꽤 오래도록 하고 난
어와 긔 뉘신고 廉恥(염치) 업산 옵노라.
아! 그쪽은 누구신가? 없는 나올시다.
初更(초경)도 거윈 긔 엇지 와 겨신고.
오후 7시 - 9시 거의 지났는데 그 어찌 계신가?
年年(연년)에 이러기 苟且(구차) 줄 알건마
해마다
쇼 업 窮家(궁가)애 혜염만하 왓삽노라.
없는 가난한 집 걱정 많아 왔노라.
<본사 4 : 농우를 빌리러 갔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옴>
『공니나 갑시나 주엄즉도 다마
공것으로나 값을 치루거나 줄만도 하지만은
다만 어제밤의 거넨집 져사람이
건넛집
목불근 수기稚(치)를 玉脂泣(옥지읍)게 어고
목 붉은 장끼(수꿩)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 오르게 구워내고
간 이근 三亥酒(삼해주)를 醉(취)토록 勸(권)거든,
갓 익은 삼해주(정월 셋째 해일(亥日)에 빚은 좋은 술) 취하도록
이러한 은혜를 어이 아니 갑흘넌고.
갚겠는가?
來日(내일)로 주마고 큰 言約(언약)야거든,
내일에 (소를) 빌려 주겠다고 굳은 약속 하였는데
失約(실약)이 未便(미편)니 사셜이 어려왜라.』
약속을 어김 편하지 아니 하니 말씀 드리기 어려워라.
『 』⇒ 소를 빌려 줄 수 없다는 상대방의 이야기
實爲(실위) 그러면 혈마 어이고.
사실이 설마 어이할꼬?
헌 먼덕 수기 스고 측업슨 집신에 설피설피 물너오니
헌 멍덕(짚으로 만든 모자) 숙여 쓰고 축이 없는 짚신에 맥없이 물러 나오니
風彩(풍채) 저근 形容(형용)애 즈칠 이로다.
덩치 작은 모습에 개 짖을
<본사 5 : 집에 돌아와 야박한 세태를 한탄하며 춘경을 포기함>
蝸室(와실)에 드러간 잠이 와사 누어시랴.
달팽이집(작고 누추한 집, 자기 집을 겸손히 일컫는 말) 와서 누웠으랴?
北窓(북창)을 비겨 안자 기다리니,
북쪽 창문 기대어 앉아 새벽
無情(무정) 戴勝(대승)은 이 恨(한)을 도우다.
오디새(봄에 밭 갈기를 재촉한다고 함) 나의 돕는구나.
終朝惆悵(종조 추창)며 먼 들흘 바라보니
아침 나절 내내 슬퍼하며 먼 들을
즐기 農歌(농가)도 興(흥) 업서 들리다.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이 없이 들린다.
世情(세정) 모 한숨은 그칠 줄을 모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른다.
아온 져 소뷔 볏보님도 됴세고.
아까운 쟁기의 사투리 쟁기의 날이 잘 선 모양 좋을시고
가시 엉긘 묵은 밧도 容易(용이)케 갈련마,
엉킨 묵은 밭도 쉽게 갈련마는
虛堂半壁(허당반벽)에 슬듸업시 걸려고야.
빈 집 벽에 쓸데없이 걸렸구나.
春耕(춘경)도 거의거다. 후리쳐 더뎌 두쟈.
봄 갈이도 거의 다 지났나니 내팽개쳐 던져 두자.
<결사 1 : 자연을 벗삼으면서 절로 늙기를 소망함>
江湖(강호) 을 언 지도 오려니,
자연을 벗삼아 살겠다는 꿈 꾼 지도 오래더니
口腹(구복)이 爲累(위루)야 어지버 이져다.
먹고 사는 것이 누(꺼리낌)이 되어 아아! 잊었도다.
瞻彼淇燠(첨피기욱)혼 綠竹(녹죽)도 하도 할샤.
저 기수의 물가를 쳐다 보니 푸른 대나무가 많기도 하구나.
有斐君子(유비 군자)들아 낙나 빌려라.
교양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 주오.
蘆花(노화) 깁픈 곳애 明月淸風(명월청풍) 벗이 되야,
갈대꽃 깊은 곳에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님 업 風月江山(풍월 강산)애 절로절로 늘그리라.
임자 없는 자연에 절로절로(근심없이) 늙으리라.
無心(무심) 白鷗(백구)야 오라 며 말라 랴.
사심없는 갈매기야 (나에게) 오라고 하랴 말라고 하랴.
다토리 업슬 다문 인가 너기로다.
다툴 사람이 없는 것이 다만 이것 뿐인가 여기노라.
<결사 2 : 貧而無怨(빈이 무원)하고 簞食瓢飮(단사표음)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충효와 화형제․신붕우에 힘씀>
無常 이 몸애 무슨 志趣(지취) 이스리마
보잘 것 없는 뜻과 취향 있으리오마는
두세 이렁 밧논을 다 무겨 더뎌 두고,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 두고
이시면 粥(죽)이오, 업시면 굴물망졍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 망정
남의 집 남의 거슨 전혀 부러 말렷노라.
남의 것은 부러워 않겠노라.
貧賤(빈천) 슬히 너겨 손을 혜다 물러가며,
빈천을 싫게 여겨 내젓는다고
남의 富貴(부귀) 불리 너겨 손을 치다 나아 오랴.
부럽게 여겨 친다고
人間(인간) 어 일이 命(명) 밧긔 삼겨시리.
인간 세상의 어느 운명 밖에 생겼으리?
貧而無怨(빈이 무원)을 어렵다 건마
가난하나 원망하지 않음을
生涯(생애) 이러호 설온 은 업노왜라.
생활이 이러하지만 서러운 뜻은 없노라.
簞食瓢飮(단사표음)을 이도 足(족)히 너기로라.
도시락 밥에 표주박 물(가난한 생활)을 만족하게 여기노라.
平生(평생) 이 溫飽(온포)에 업노왜라.
하나의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음이 아니로다.
太平天下(태평천하)애 忠孝(충효)를 일을 삼아
충성과 효도로
和兄弟(화형제) 信朋友(신붕우) 외다리 뉘 이시리.
형제 간에 화목하고 벗들과 믿음으로서 사귐을 그르다 할 사람이 누가 있으리?
그 밧긔 남은 일이야 삼긴 로 살렷노라.
그 밖에 나머지 일이야 생긴대로(타고난 대로) 살겠노라.
<현대어 풀이>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둡기로는 이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모든 운수를 하늘에게 맡겨 두고 누추한 깊은 곳에 초가를 지어 놓고, 고르지 못한 날씨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초라한 음식을 만드는 데 연기가 많기도 많구나. 덜 데운 숭늉으로 고픈 배를 속일 뿐이로다. 살림살이가 이렇게 구차하다고 한들 대장부의 뜻을 바꿀 것인가. 안빈낙도하겠다는 한 가지 생각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서, 옳은 일을 좇아 살려 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가을이 부족한데 봄이라고 여유가 있겠으며 주머니가 비었는데 술병에 술이 담겨 있으랴. 가난한 인생이 천지간에 나뿐이로다.
배고픔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 한들 일편 단심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어서 죽어서야 말겠노라고 마음먹어,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전란 5년 동안에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 몇백 전을 치루었던가?
한 몸이 겨를이 있어서 집안을 돌보겠는가? 늙은 종은 하인과 주인의 분수를 잊어버렸는데, 나에게 봄이 왔다고 일러 줄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밭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어야 한다지만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분수에 맞는 줄을 알겠도다.
들에서 밭 갈던 은나라의 이윤과 진나라의 진승을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지마는 아무리 갈려고 한들 어느 소로 갈겠는가. 가뭄이 몹시 심하여 농사철이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갠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흐르는 물을 반쯤 대어놓고는, 소 한 번 주마 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이 없는 저녁에 허우적허우적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에헴하는 인기척을 꽤 오래도록 한 후에, 어, 거기 누구신가?묻기에 염치없는 저올시다.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무슨 일로 와 계신고?해마다 이러기가 구차한 줄 알지마는 소 없는 가난한 집에서 걱정이 많아 왔소이다.공것이나 값을 치거나 간에 주었으면 좋겠지마는, 다만 어젯밤에 건너집에 사는 사람이 목이 붉은 수퀑을 구슬 같은 기름이 튀게 구워 내고 갓 익은 좋은 술을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 않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고 굳게 약속을 하였기에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 말씀하기가 어렵구료.정말로 그렇다면 설마 어찌하겠는가.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적은 내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다.
작고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겠는가? 북쪽 창문에 기대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오디새는 나의 한을 돕는구나. 아침이 끝날 때까지 슬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 없게 들리는구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른다. 아까운 저 쟁기는 볏보임(쟁기의 날)도 좋구나. 가시가 엉킨 묵은 밭도 쉽게 갈 수 있으련마는, 빈 집 벽 한 가운데 쓸데없이 걸려 있구나! 봄갈이도 거의 다 지났다. 팽개쳐 던져 버리자.
자연을 벗삼아 살겠다는 한 꿈을 꾼 지도 오래더니 먹고 사는 것이 누가 되어, 아 슬프게도 다 잊었도다. 저 냇가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많기도 많구나. 교양 있는 선비들아, 낚시대 하나 빌리려무나, 갈대꽃 깊은 곳에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의 벗이 되어, 임자가 없는 자연 속에서 절로절로(근심없이) 늙으리라. 무심한 갈매기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가라고 하랴?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생각하노라.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무슨 갸륵한 뜻이나 취향이 있으랴마는 두어 이랑의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 두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내 가난과 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내젓는다고 물러가겠으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짓을 한다고 나아오겠는가? 인간의 어느 일이 운명과 상관없이 생겼으랴? 가난해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하건마는 내 생활이 이렇다 해서 서러운 뜻은 없노라. 가난한 생활이지만 이것도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노라. 평생의 한 뜻이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노라.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친구와 신의 있게 사귀는 것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밖의 나머지 일이야 타고난 대로 살겠노라.
<참고 자료>
1.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조선 시대 무신.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임진왜란 때에는 수군에 종군하였고, 3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에 이르렀으나, 후에 벼슬을 사직하고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안빈낙도하는 도학사상, 우국지정이 넘치는 충효 사상, 산수 명승을 즐기는 자연애 사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송강과 함께 가사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며, 가사 7편과 '오륜가' 등 시조 72수가 <노계집(蘆溪集)>에 전한다.
2. ‘누항’의 의미
'누항'이란 '논어'에 나오는 말로, 가난한 삶 가운데도 학문을 닦으며 도를 추구하는 즐거움을 즐기는 공간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가난하나 원망하지 않는 '빈이무원(貧而無怨)'의 경지나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安貧落島)'함을 알게 해 준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당대의 산림에 묻힌 선비들의 고절한 삶과 현실의 부조화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3. <누항사>의 문학적 가치
이 작품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작품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생활 현실의 사실적 묘사에 있다. 특히 몸소 농사를 지어야 하는 형편임에도 소가 없어서 한탄하고, 소를 빌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저녁 무렵에 쓸쓸히 돌아오는 대목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생활 묘사의 사실성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가사에서 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가사의 사적(史的)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4. 조선 후기 가사의 특징
① 평민 의식의 대두로 인한 산문 정신의 영향으로 서정적 내용에서 서사적인 내용으로 바뀐다.
② 전기 가사의 음풍농월의 관념적 표현에서 현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표현이 주를 이룬다.
③ 전대의 양반 가사에서 평민 가사, 규방 가사로 확대되며, 규방 가사는 규중 부녀자들의 섬세한 감정이 국문으로 진술된다.
<누항사 전문>
어리고 迂闊(우활)산 이 우 더니 업다
吉凶 禍福(길흉화복)을 하날긔 부쳐 두고
陋巷(누항) 깁푼 곳의 草幕(초막)을 지어 두고,
風朝雨夕(풍조우석)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셔홉 밥 닷 홉 粥(죽)에 煙氣(연기)도 하도 할샤.
설데인 熟冷(숙냉)애 뷘 쇡일 이로다.
生涯(생애) 이러다 丈夫(장부) 을 옴길런가.
安貧一念(안빈일념)을 젹을망정 품고 이셔.
隨宜(수의)로 살려 니 날로조차 齟齬(저어)다.
히 不足(부족)거든 봄이라 有餘(유여)며,
주머니 뷔엿거든 甁(병)의라 담겨시랴.
貧困(빈곤) 人生(인생)이 天地間(천지간)의 나이라.
飢寒(기한)이 切身(절신)다 一丹心(일단심)을 이질가.
奮義忘身(분의망신)하야 죽어야 말녀 너겨.
于橐(우탁) 于囊(우낭)의 줌줌이 모와 녀코,
兵戈(병과) 五載(오재)예 敢死心(감사심)을 가져 이셔,
履尸涉血(이시섭혈)야 몃 百戰(백전)을 지연고.
一身(일신)이 餘暇(여가)잇사 一家(일가)를 도라보랴.
一奴長鬚(일노장수) 奴主分(노주분)을 이졋거든,
告余春及(고여춘급)을 어 사이 생각리.
耕當問奴(경당문노)인 눌더려 물고.
躬耕稼穡(궁경가색)이 分(분)인 줄 알리로다.
莘野耕叟(신야경수)와 壟上耕翁(농상경옹)을 賤(천)타 리 업것마
아므려 갈고젼 어 쇼로 갈로손고.
旱旣太甚(한기태심)야 時節(시절)이 다 느즌 졔
西疇(서주) 놉흔 논애 잠 녈비예
道上(도상) 無源水(뮤원수)를 반만 혀 두고,
쇼 젹 듀마고 엄섬이 말삼,
親切(친절)호라 너긴 집의 달 업슨 黃昏(황혼)의 허위허위 다라가셔
구디 다 門(문) 밧긔 어득히 혼자 서서
큰 기 아함이를 良久(양구)토록 온 後(후)에
어와 긔 뉘신고 廉恥(염치) 업산 옵노라.
初更(초경)도 거윈 긔 엇지 와 겨신고.
年年(연년)에 이러기 苟且(구차) 줄 알건마
쇼 업 窮家(궁가)애 혜염만하 왓삽노라.
공니나 갑시나 주엄즉도 다마
다만 어제밤의 거넨집 져사람이
목불근 수기稚(치)를 玉脂泣(옥지읍)게 어고
간 이근 三亥酒(삼해주)를 醉(취)토록 勸(권)거든,
이러한 은혜를 어이 아니 갑흘넌고.
來日(내일)로 주마고 큰 言約(언약)야거든,
失約(실약)이 未便(미편)니 사셜이 어려왜라.』
實爲(실위) 그러면 혈마 어이고.
헌 먼덕 수기 스고 측업슨 집신에 설피설피 물너오니
風彩(풍채) 저근 形容(형용)애 즈칠 이로다.
蝸室(와실)에 드러간 잠이 와사 누어시랴.
北窓(북창)을 비겨 안자 기다리니,
無情(무정) 戴勝(대승)은 이 恨(한)을 도우다.
終朝惆悵(종조 추창)며 먼 들흘 바라보니
즐기 農歌(농가)도 興(흥) 업서 들리다.
世情(세정) 모 한숨은 그칠 줄을 모다.
아온 져 소뷔 볏보님도 됴세고.
가시 엉긘 묵은 밧도 容易(용이)케 갈련마,
虛堂半壁(허당반벽)에 슬듸업시 걸려고야.
春耕(춘경)도 거의거다. 후리쳐 더뎌 두쟈.
江湖(강호) 을 언 지도 오려니,
口腹(구복)이 爲累(위루)야 어지버 이져다.
瞻彼淇燠(첨피기욱)혼 綠竹(녹죽)도 하도 할샤.
有斐君子(유비 군자)들아 낙나 빌려라.
蘆花(노화) 깁픈 곳애 明月淸風(명월청풍) 벗이 되야,
님 업 風月江山(풍월 강산)애 절로절로 늘그리라.
無心(무심) 白鷗(백구)야 오라 며 말라 랴.
다토리 업슬 다문 인가 너기로다.
無常 이 몸애 무슨 志趣(지취) 이스리마
두세 이렁 밧논을 다 무겨 더뎌 두고,
이시면 粥(죽)이오, 업시면 굴물망졍
남의 집 남의 거슨 전혀 부러 말렷노라.
貧賤(빈천) 슬히 너겨 손을 혜다 물러가며,
남의 富貴(부귀) 불리 너겨 손을 치다 나아 오랴.
人間(인간) 어 일이 命(명) 밧긔 삼겨시리.
貧而無怨(빈이 무원)을 어렵다 건마
生涯(생애) 이러호 설온 은 업노왜라.
簞食瓢飮(단사표음)을 이도 足(족)히 너기로라.
平生(평생) 이 溫飽(온포)에 업노왜라.
太平天下(태평천하)애 忠孝(충효)를 일을 삼아
和兄弟(화형제) 信朋友(신붕우) 외다리 뉘 이시리.
그 밧긔 남은 일이야 삼긴 로 살렷노라.